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한국사이야기

신라의 성장과 발전

by 꿈꾸는아즈미 2023. 1. 17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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▣ 신라의 성장과 발전

 

 

 

□ 내물마립간(17대 : 356~402)

 

① 김씨가 독점적으로 왕위를 세습하게 되었다.

 

② 왕호를 이사금에서 마립간으로 바꾸었다.

 

③ 광개토 대왕의 도움으로 왜군을 축출하였다. (호우명 그릇 : 광개토대왕에 대한 제기).

 

 

*마립간(麻立干)은 수장(首長)을 뜻하는 '간(干)'앞에 '마립'이 붙어 이루어진 칭호이다.

<삼국사기(三國史記)>에 인용된 김대문의 설명에 의하면, '마립'은 신라 말로 말뚝을 뜻하며, 왕과 신하가 위치하는 자리인 '함조'를 일컫는다.

 

 

 

□ 눌지 마립간(19대 : 417~458)

 

① 백제의 비유왕과 나제 동맹을 체결하였다( 433).

 

② 고구려 승려 묵호자가 불교를 전래하였다.

 

③ 부자 상속제가 확립되었다.

 

 

*나제동맹 : 삼국시대 서기 433년부터 서기 554년까지 121년 동안 지속된 신라와 백제의 대 고구려 군사 동맹이다.

신라의 '라'와 백제의 '제'를 따와서 붙였으니 '라제동맹'이라고 해야 맞지만 두음법칙에 따라 '라'자가 '나'자가 된다.

일각에서는 백제가 동맹을 주도했다는 점을 강조하며 제라동맹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.

 

 

 

□ 소지 마립간(21대 : 479~500)

 

① 우역제 실시 : 경주를 중심으로 사방에 역로를 개설하였다. -지방 통제 강화

 

② 수도(금성)에 시장이 개설되었다.

 

③ 백제의 동성왕과 결혼 동맹을 체결하였다(493).

 

*동성왕 : 493년(동성왕 15년)에는 당시 신라의 군주였던 소지 마립간에게 권유해서 혼인을 청하니 이찬 비지의 딸을 백제로 시집을 보내기도 했고, 494년(동성왕 16년)과 495년(동성왕 17년) 두 해에 걸쳐 백제와 신라를 번갈아 침공해 오는 고구려의 군대를 신라와 연합해 격퇴하는 등 나제동맹을 더욱 공고히 했다.

 

 

 

 

□ 지증왕(22대 : 500~514)

 

① 우산국(현재의 울릉도)을 복속시켰다. - 독도도 우리 영토로 편입

 

② 우경을 시작하고, 수리 사업을 진행하였다. - 농업 생산력 향상

 

동시전(시장을 관리, 감독하는 기구)을 설치하였다.

 

④ 국호를 '신라'로 정하고 '왕(王)'의 호칭을 사용하였다(503).

 

순장 금지 : 노동력을 확보하였다.

 

 

*동시전(東市典) : 신라시대의 관서로 수도인 경주에 설치된 동시(東市)의 업무를 관장하기 위해 509년(지증왕 10)에 설치되었다.

 

 

 

 

□ 법흥왕(23대 : 514~540)

 

① 율령을 반포하였다.

 

②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다(520).

 

이차돈의 순교로 불교가 공인되었다(527)

 

④ 병부 및 상대등을 설치하였다.

 

영토 확장 : 김해 지방의 금관가야를 병합하였다.

 

⑥ '건원'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였다(536).

 

*이차돈 : 삼국시대 신라의 제23대 법흥왕 때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스스로 순교한 불교인.

*순교 :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행위를 말한다.

 

 

 

 

□ 진흥왕(24대 : 540~576)

 

정복 사업 : 한강 유역까지 진출하였다(진흥왕 12년, 551).

 

  · 한강 상류 지역 장악 - 단양적성비

  · 한강 하류 지역 장악 - 북한산비

  · 대가야 정벌을 통한 낙동강 유역 장악 - 창녕비

  · 동북으로는 함흥평야까지 진출 - 황초령비, 마운령비

 

② 남양만에 당항성을 쌓아 직접 중국과 통교하였다.

 

③ 거칠부가 「국사」를 편찬하였다.

 

연호 사용 : 개국, 대창, 홍제

 

⑤ 씨족 사회의 청소년 집단이던 화랑도를 국가적 조직으로 개편하였다.

 

⑥ 숭불 정책 : 황룡사를 건축하였다.

 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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